이 글에는 임진왜란에서 일본과 큰 전투를 두 차례 치렀던 '진주성'과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진주성
예부터 왜구를 막는 중요한 성
진주성 촉석성이라고도 하는데 본래 백제 때 쌓은 성이었어요. 고려 말 공민왕 때 7차례 손질하여 고쳐 지었고, 왜구 방비의 기지로 사용되었어요. 내성의 둘레는 1.7 킬로미터, 외성의 둘레 약 4킬로미터예요.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어 있어요.
일본이 진주성을 공격한 이유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한양까지 침략한 왜군은 평양과 함경도까지 손쉽게 점령했어요. 1592년 5월 김해에 도착한 왜군은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에 진출하려 했으나 실패했어요. 왜군은 또다시 남해안을 따라 바다와 육지를 동시에 공격하는 작전을 펼치려 했지만, 7월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에게 크게 패배하면서 이 작전 역시 실패하게 되지요. 왜군은 수군이 계속 패하자 육로로 진입하여 전라도로 가는 관문인 진주성을 점령해 전라도의 진입로를 확보하려고 했어요.
제1차 진주성 전투
1592년 10월 5일, 일본군은 진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부산, 동래, 김해 지역에 있던 정예병 3만여 명을 동원해 진주성을 공격했는데, 진주 목사 김시민은 3,800여 명의 군사와 백성들을 모아 진주성을 방어했어요. 무려 열 배에 가까운 병력이 차이가 났지만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며, 성 밖에서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의병이 합세하여 일본군을 견제했어요. 결국 일본군은 엿새 동안 진주성을 공격했으나 결사적인 저 항에 부딪쳐 공략을 포기하고 10월 10일 후퇴했어요. 이것이 임진왜란 3 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에요.
진주성 전투의 성과
진주성 전투는 많은 성과를 거두었어요. 제1 차 전투에서의 승리는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일본군의 계획을 좌절시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어요. 또한 의주까지 피난 한 선조 임금을 비롯한 백성과 군사들, 의병들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워 주었지요. 비록 진주성은 함락되고 말았지만, 왜군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입혔어요.
제2차 진주성 전투
제1차 전투에서의 참패로 위신이 추락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3년 6월 부하들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명령을 내렸어요. 왜군은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9일 10만 명의 병력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조선은 김천일, 최경회 등이 이끈 3,400명의 병력과 6만여 명의 일반 백성들이 왜군의 공격을 막았어요. 6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전투는 왜군의 거듭된 공격과 치열한 공방 끝에 진 주성의 거의 모든 장병이 죽고, 29일에 결국 진주성은 함락되고 말았어요.
진주성의 누각 촉석루
촉석루는 진주성의 상징이자 영남 제일의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에요. 진주성의 남쪽 석벽 위에 우 뚝 서 있어 남강과 진주시를 한눈에 볼 수 있지요. 고려 고종 28년(1241)에 세워져 평상시에는 1차 과거 시험을 치르는 장소로 사용되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 본부가 되었어요. 이곳에서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 졌다고 해요.
논개는 기생이 아니다?
논개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가 나중에 맞아들인 아내였어 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남편 최경회가 죽자 논개는 남편의 원수를 갚을 뜻을 품었어요. 1593년 7월 일본군 왜장들이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벌인 술자리에 논개는 기생으로 변장하여 참석했어요. 그녀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아무라 로쿠스케를 꾀어 바위에 올라 그를 껴안고 남강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지요. 훗날 논개가 적장을 껴안고 떨어진 바위를 의로운 바위란 뜻으로 의암이라 불렀으며, 그 옆에 의기사라는 사당을 세워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냈어요.
위와 같이 임진왜란에서 중요한 요충지였던 '진주성'과 관련하여 정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