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병자호란의 아픔이 담긴 '남한산성'과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남한산성

 

남한산성
남한산성

여진족의 침략 '정묘호란'

7년 동안 계속된 임진왜란에서 조선과 명나라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두 나라 모두 큰 타격을 받았 어요. 그 틈을 타 만주에 있던 여진족은 세력을 키워 금이라는 나라를 세웠어요. 나중에 생긴 금나라라고 하여 후금이라 불러요. 커져가는 후금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명나라는 후금을 정벌하고자 조선에 도움을 청했는데, 이를 알아차린 후금이 1627년(인조 5년)에 조선을 공격했어요. 이를 '정묘호란'이라고 해요. 두 나라 모두 전쟁이 오래 이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형제처럼 지내기로 약속하고 전쟁을 끝냈어요.

 

청나라의 공격에 속수무책'병자호란'

이후 후금은 더 세력을 키워 결국 명나라까지 무너뜨리고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꿨어요. 청나라는 조선은 신하의 나라이니 황제의 나라인 청나라를 섬길 것을 요구했어요. 조선은 청나라의 요구를 거절했고, 이에 1636년에 청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는데 이를 '병자호란'이라 해요. 청의 황제 태종은 10만 군사를 이끌고 10여일 만에 한성 근처까지 밀고 내려왔어요.

 

병자호란의 아픔이 생생한 곳

청나라의 거센 공격에 인조 임금은 가족들을 먼저 강화도로 보낸 뒤,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어요.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성에서 45일을 버텼지만, 더 이상 청나라의 대군을 막기가 힘들었어요. 청나라 군대의 수가 조선군의 열 배가 넘는 데다가 식량도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강화도의 함락 소식이 들리자 인조는 성문을 열고 청나라에게 항복을 하고 말지요.

 

삼전도의 굴욕 : 삼배구도두례

결국 1637년 1월 인조는 삼전도로 나가 청나라에게 항복했어요. 삼전도란 조선 시대에 한성과 남한산성을 이어 주던 나루로, 당시 청나라의 지휘 본부가 있던 곳이에요. 인조는 낮은 신분을 뜻하는 푸른색 옷으로 갈아입고 청나라의 태종을 향해 항복의 의미로 세 번 엎드려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를 실시했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청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섬기겠다고 약속했지요.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해요.

 

종묘와 사직을 갖춘 남한산성 행궁

1626년 인조 임금 때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해 남한산성 안에 행궁을 지었어요. 행궁이란 임금이 궁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르던 별궁이지요. 조선 시대에는 전국에 20여 개의 행궁이 있었는데 그중 남한산성의 행궁은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갖추고 있었어요.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부수도의 역할을 했으며, 왕이 실제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역사적 기록이 있는 곳이에요. 원래 상궐 73칸, 하궐 154칸 등으로 이루어졌으나 모두 불에 타서 없어진 것을 1999년부터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복원했어요.

수어장대

남한산성의 수어장대는 조선 인조 2년(1624)에 만들어진 4개의 장대중 하나예요. 서장대라고도 하지요. 장대란 높은 곳에 쌓은 지휘소를 말하는 데 전시 때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는 곳이지요. 병자호란 때 인조가 직접 전투 지휘를 기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처음에는 단층 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라 부르던 것을, 1751 년(영조 27)에 대 위에 누각을 증축해 2층으로 만 들었어요. 2층 누각의 이름은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의 '무망루' 이지요.

 

난공불락의 요새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한양을 지키는 산성으로 백제, 통일 신라, 고려, 조선 등 오랜 시대에 걸쳐 한강 유역 및 수도에 대한 방어를 하던 곳이에요. 비록 병자호란의 패배로 인해 치욕의 역사로 기억되지만, 사실 남한산성은 1300여 년에 달하는 긴 역사 속에서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예요. 실제로 병자호란 때에도 청나라 군사들이 끝내 성은 함락하지 못했지요.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어요.

 

위와 같이 병자호란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남한산성'에 대해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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