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이황의 가르침이 담긴 경상북도 안동시에 위치한 '도산 서원'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퇴계 이황이 세운 도산 서원
퇴계 선생이 세운 도산 서당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안동에 내려와 지은 건물로, 1561년(명종 16)에 세워졌어요. 이황이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이황이 직접 설계했다고 전해져요. 건물의 방향은 물론 세세한 수치까지 정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만들 었어요. 서당은 일(一)자 형태의 총 세칸으로 이루어진 작은 건물로, 부엌과 온돌방 마루로 이루어져 있어요. 이황이 거처하며 제자를 교육하던 방인 '완락재'로, 마루는 '암서헌'이라 불렀지요.
제자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
농운정사는 이황의 제자들이 머무는 기숙사로, 총 8칸으로 되어 있어요. 공(工)자형 집으로 지었는데 이는 공부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고 해요. 사방에 창문을 많이 내어 밝은 빛과 맑은 공기가 들어오도록 하여 공부에 도움을 주었어요. 이 건물 역시 이황이 직접 기본 설계를 했다고 해요.
퇴계 선생의 제자들이 지은 도산 서원
도산 서원은 이황의 제자들과 유생들이 힘을 모아 이황이 세상을 떠난지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했어요. 도산 서당 뒤편에 이황의 위패를 모시는 상덕사라는 사당을 짓고, 전교당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을 완성 했어요. 1575년에는 선조 임금이 명필 한석봉 쓴 '도산서원'의 현판을 내려 사액 서원이 되었지요. 전체적으로 간결하고 검소하게 꾸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닦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어요.
동방의 주자 이황
12세가 되던 해에 《논어》를 배우기 시작한 이황은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를 교육하는 시강원과 오늘날의 대학교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에서 학문을 가르쳤어 요. 그 뒤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지만 학문 연구와 교육에 뜻을 두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가 서당을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힘을 쏟았지요. 공자의 가르침을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시킨 주자의 책과 사상을 연구하고 학문적으로 발전시켜 후세의 사람 들은 이황을 '동방의 주자'라고 부르기도 해요.
그림으로 그리움을 달래다.
조선의 제13대 임금 명종은 이황의 인품과 학문을 존경하여 이황에게 관직에 나와 자신을 도와줄 것을 무려 70여 차례나 부탁했어요. 그러나 이황은 그때마다 정중히 거절하였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어요. 명종은 화공에게 도산서당과 이황의 모습을 그려 오게 하였고, 그 그림을 보면서 이황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고 해요.
사라진 지폐 속 도산 서원
원래 천 원짜리 지폐의 뒷면에는 도산 서원의 전경이 담겨 있었어요. 하지만 새로 지폐가 발행되면서 앞면엔 여전히 이황 선생의 초상이 남아 있지만, 도산 서원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어요. 대신 도산 서당이 세워지기 전 이황 선생이 고향 집 근처에 처음 지은 작은 서당의 그림으로 바뀌었지요.
병중에도 퇴계 선생을 존경하다.
퇴계 이황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많은 선비들의 존경 을 받았어요. 1751년(영조 27)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익은 병으로 몸져누워 있으면서 제자인 강세황에게 퇴계 선생이 살았던 도산서원의 일대를 그리도록 시켰어요. 그리고 그림에는 자신의 소감, 현지답사 내용, 제작 시기 등을 비교적 자세히 적었어요.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퇴계 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위와 같이 퇴계 이황 선생과 안동 도산 서원에 대해 정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