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구불구불한 물길에 술잔을 흘려보냈던 '경주 포석정'과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경주 포석정

경주-포석정
경주 포석정

왕과 신하들이 모여 즐거운 놀이

879년 무렵, 신라의 제49대 임금인 헌강왕이 경주 남산 기슭의 별궁 근처에서 신하들과 잔치를 벌이던 중 재미난 놀이를 했어요. 홈을 파서 구불구불하게 만든 수로에 술잔을 띄워 보내 잔이 멈추는 곳에 앉아 있는 사람이 시를 짓는 놀이였지요. 시를 짓지 못하는 사람은 벌칙으로 술을 석 잔 연거푸 마셔야 했어요. 헌강왕과 신하들이 놀이를 즐긴 곳이 바로 포석정이에요.

 

포석정 터는 놀이터가 아니다?

포석정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해요. 구불구불하게 만든 수로와 정자가 함께 있었지만, 현재는 수로만 남아 있어요. 그동안 포석정은 신라 왕실이나 귀족들이 잔치를 벌이던 곳 또는,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학문을 배우던 곳 등으로 알려져 왔어요. 하지만 1998년 포석정의 근처에서 많은 유물과 함께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들이 출토되면서 이곳이 신라 왕실의 별궁이자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며 제사 의식을 행하던 곳이라고 짐작해요.

 

전복 껍데기와 같아 포석정!

돌에 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였는데, 그 모양이 마치 전복 껍데기 모양과 같다 하여 전복 포(鮑), 돌 석(石) 자를 써서 포석정(石亭)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화강석으로 만든 물길의 너비는 약 30센티미터, 깊이는 20센티미터이며, 높낮이의 차는 5.9센티미터, 타원형 물길의 길이는 약 22미터이지요.

 

유상곡수 놀이의 유래

중국에서 전해진풍속중에 삼월 삼짇날(음력 3월 3일)에 사람들이 흐르는 물가에 둘러앉아 술잔을 띄워 시를 지으며 술을 마시던 놀이가 있어요. 이를 '구불구불한 물길에 술잔을 흘려보낸다'는 뜻의 '유상곡수(流觴曲水) 놀이'라고 해요. 이것을 본뜬 것이 바로 포석정의 수로에서 벌어진 놀이지요.

 

과학적 계산으로 만들어지다.

중국과 일본에도 포석정 같은 유상곡수 유적이 남아 있지만 어느 자리에서 술잔을 띄워도 다른 술잔과 부딪치지 않고 흘러가다가 한 곳 에서 맴돌 수 있는 것은 포석정 뿐이라고 해요. 기체나 액체 등 흐르는 물체의 운동을 다루는 분야를 '유체 역학'이라고 하는데, 그 지식을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신라인들이 철저한 과학적 계산 아래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와류현상

흐르는 물의 속도와 방향을 급격히 바꾸면 속 도와 방향이 서로 다른 물의 흐름이 부딪치면서 새로운 물의 흐름이 만들어지는데, 이때 물 이 팽이처럼 한 곳에서 회전하는 소용돌이도 만들어지지요. 이렇게 물이나 공기의 흐름을 거슬러 회전하는 소용돌이 현상을 '와류'라고 해요. 포석정은 이러한 와류 현상을 일어나도록 만든 것이지요.

 

포석정에서 최후를 맞이한 경애왕

신라 제55대 임금 경애왕이 왕위에 오른 지 4년째 되던 해인 927년, 11월에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함께 잔치를 벌였어요.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이 공격해 왔으나, 적이 오는 줄도 모르고 놀이에 빠져 있었지요. 결국 견훤에게 붙잡힌 경애왕은 견훤의 강압적인 권유로 자결했다고 해요.

 

춤을 유행시킨 헌강왕

《삼국유사>에 의하면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해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갑자기 남산 신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신하들 눈에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해요. 그 래서 헌강왕이 손수 남산 신이 춤추던 모습을 흉내 내추 었는데, 그 후부터 그 춤이 널리 퍼졌어요. 남산 신의 이름을 따서 춤의 이름은 '어무산신(御舞山神)' 혹은 '어무상심 (御舞祥審)' 등으로 불렸으며, 고려시대까지 유행했다고 해요. 이는 포석정에서 제사 의식을 통해 신과의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뜻한답니다

위와 같이 통일신라의 유적인 '포석정'에 대해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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