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고려의 '공민왕'과 북한 개성시에 있는 '공민왕릉'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고려의 왕 : 공민왕
공민왕은 어떤 왕이었나
고려는 1231년부터 30여 년간 몽골의 침입에 맞섰지 만,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지배와 간섭을 받게 돼요. 무려 100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말이에요. 그러다가 1351년 고려 제31대 임금인 공민왕이 21세 의 젊은 나이로 즉위했어요. 그는 이전의 다른 왕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어요.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하면서 고려의 개혁 정치를 이끌었지요.
공민왕의 죽음과 함께 기운 고려의 운명
공민왕은 고려의 정치에 간섭을 하던 기구인 정동행성과 원나라 통치 기구인 쌍성총관부를 없애고, 원나라 기황후의 오빠 기철을 처형하며 고려의 부흥을 위한 개혁 정치를 진행했어요. 하지만, 사랑했던 부인이 죽자 모든 의욕을 잃고 지내다가 결국 내시 최만생 등이 주도한 음모에 빠져 죽음을 맞이했어요. 공민왕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는 멸망하고 말아요.
공민왕이 시행한 정책
고려 공민왕이 시행한 정책은 항목과 같습니다.
- 원나라의 연호와 관제를 사용하지 않는다.
- 고려의 풍속을 되찾고 변발과 호복 등의 몽골의 풍속을 금지한다.
- 귀족들이 얻는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인 백성들에게 돌려준다.
-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다시 양민으로 해방시켜 준다.
공민왕이 사랑한 노국대장공주
노국대장공주는 원나라 공주 출신으로 몽골 이름은 보탑실리예요. 공민왕이 왕자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머물 당시 공민왕과 결혼하여, 공민왕이 고려의 왕이 되자 함께 고려에 왔어요. 원나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반원 자주 개혁 정치를 적극적으로 후원했으며, 이에 불만을 품은 친원파들이 공민왕을 죽이려 할 때에도 공민왕을 보호했다고 해요. 공민왕의 사랑도 듬뿍 받았고요. 하지만 노국공주가 아기를 낳다가 죽고 말아 공민왕은 큰 슬픔에 빠졌어요.
아내를 그리워하며 무덤을 만들다.
1365년 왕비인 노국공주가 아이를 낳다 죽자 공민왕은 직접 주관하여 9년이란 오랜 기간에 걸쳐 방대한 무덤을 지었어요. 그 능이 바로 공민왕릉에 있는 정릉 이에요. 능의 건축과 설계는 당시 고려의 수학, 천문 지리, 석조 건축물, 조형 예술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담당했어요. 가장 위의 단에 봉분을 두고 그 아래로 여러 개의 층단을 구성해 조각과 시설을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장엄한 분위기를 내었지요.
두 개의 무덤이 사이좋게
공민왕은 죽은 뒤 노국 공주의 정릉 옆에 무덤을 만들 어 묻혔어요. 그래서 두 개의 무덤이 쌍을 이루고 있 지요. 공민왕이 묻힌 무덤인 현릉은 서쪽에, 노국 공 주가 묻힌 무덤인 정릉은 동쪽에 있어요. 그리고 현릉과 정릉 사이에 연결된 구멍을 만들어 영혼이 통하는 길을 만들었어요. 공민왕의 노국공주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엿볼 수 있어요.
조선 왕릉의 모범이 되다.
원래 고려의 왕과 왕비의 무덤은 따로 만들었는데, 공 민왕릉 때 처음으로 같은 곳에 무덤을 만들게 되었어 요. 무덤 앞에는 사람의 형상을 한 돌 조각상이 세워져 있어요. 문신의 복장을 한 문인석과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무인의 모습을 한 무인석 이 있지요. 이처럼 문인석과 무인석을 구별하여 세 운 것도 공민왕릉이 유일해요. 이런 점이 조선까지 이어져 조선 왕릉의 모범이 되었다고 해요.
참고 : 왕비를 위해 지은 아름다운 무덤 타지마할
인도 무굴 제국의 황제였던 샤자한은 왕비 뭄타즈 마할이 아기를 낳다가 죽자, 그녀 의 영혼을 위해 세계의 뛰어난 건축가와 석공들을 불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 인 인도의 타지마할을 만들었어요. 타지마할이 완성되는 데 무려 22년이 걸렸고, 샤자한은 다시는 타지마할만큼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지 못하도록 건설에 참여했던 기 술자들의 손목을 모두 잘라 버렸다고 해요. 그 뒤 샤자한은 건축물을 세우는 데에만 몰두하는 등 국가의 재정을 낭비하다가 반란을 일으킨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성에 감금되어 불행한 삶을 살다가 죽고 말았어요.
위와 같이 고려의 '공민왕'과 '공민왕릉'에 대해 정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