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서울 문묘와 성균관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고려 및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대한 내용을 본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목차
서울 문묘, 성균관
고려와 조선의 국립 대학교
성균관은 고려 말과 조선의 초고 교육기관이에요. 지금의 국립 대학교에 해당하지요. 하지만, 성균관은 양반 가문의 아들만 갈 수 있었지요. 성균관의 '성균'이란 유교의 경전인 '주례'에 나오는 말로 음악의 조율을 맞추듯 어그러짐을 바로잡아 넘치거나 부족한 것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에요.
명륜동에 세워지 성균관
성균관은 1398년 지금의 서울 명륜동에 세워졌어요. 성균관의 명륜당은 학생들에게 유학을 강의하던 강당으로 약 200명 정도의 학생들이 공부했어요. 동/서재는 학생들이 묵는 기숙사로 모두 28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지금으로부터 600년도 더 된 국립대학이 있다니 놀랍지요?
유생은 성균관의 학생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은 유생(儒生)이라 불렀 으며, 유학의 경전인 사서와 오경을 공부했어요. 유생들에게는 매월 말 그동안 공부한 것에 대한 성과를 시험 보아 확인했으며, 그 결과는 국가에까지 보고되는 등 매우 엄격했어요. 기숙사 앞에는 돌이 하나 있는 데, 유생들이 시험을 잘못 보았을 때 그 돌에 올라가 자신의 종아리를 회초리질 했다고 해요. 그만큼 스스로 나태해지는 것을 경계하며 열심히 공부했어요.
성균관 명칭의 변천사
1992년 고려 성종 때 최고 교육 기관인 국자감이 만들 어졌어요. 1289년 고려 충렬왕 때 국자감의 이름을 '성균'으로 바꾸었지요. 그러다 1308 년 고려 충선왕 때 성균관으로 불리기 시작하였으나, 1356년 공민왕 이 다시 국자감으로 이름을 바꾸었어요. 1362년에야 드디어 성균관이라는 이름을 되찾게 되었고, 조선 건 국 이후에도 계속 성균관이라 불렀답니다.
몸도 튼튼하게!
명륜당 바로 뒤에는 존경각이라 불리는 도서관이 있 고, 그 옆에 육 일각이라는 건물이 있어요. 육일각에서 는 활과 화살을 보관했어요. 공부하는 곳에서 웬 활과 화살이냐고요? 유교는 학문의 연마뿐만 아니라 여섯 가지 기예, 즉 음악, 말타기, 예법, 산술, 서예, 활쏘기 에도 능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에요. 성균관 유 생들은 이처럼 활쏘기를 통해 체력 단련까지 했어요.
문묘는 공자를 모신 사당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그의 제자와 유학자 21 인과 이황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존경받는 유학자 18 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어요. 이 분들께 1년에 크게 두 번, 2월과 8월에 '석전제'라는 제사를 드리는데, 이 제 사를 문묘제례라고 해요. 공자님이 문(文)을 이룬 분이라 해서 공자님께 드리는 제사를 문묘제례라 부르 는 것이지요. 이 제사는 조선조 때 아주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임금이 직접 와서 제를 올렸어요.
개성의 성균관, 역사 박물관이 되다
북한 개성에 있는 성균관은 원래 11세기 초 고려 문종 때 '대명궁'이라는 이름의 별궁은 로 지어졌어요. 그 뒤 외국 사신들이 머무는 '순천관', 유교 경전에 대한 사무를 보는 관 '청인 '숭문관'이었다가 1089년 고려 최고 국립 교육 기관인 '국자감'이 이전을 했지요. 공민왕 때 성균관으로 이름을 바꿔 고려 말 신진 사대부들이 성장하는 중심 무대가 되었어요. 조선의 건국과 함께 한양에 따로 성균관이 지어지며 개성의 성균관은 지방 향교로 그 격이 떨어졌다가 현재 개성 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어요.
위와 같이 서울의 문묘와 성균관에 대해 정리하였습니다.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