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2월 31일 자정에는 보신각에서 33번의 종을 칩니다. 새해가 되는 시점에 타종을 하는 보신각 종을 언제부터 치게 된 것일까요? 보신각 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본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목차
보신각 제야의 종
서울의 아침을 깨우던 종소리
시계가 없던 조선 시대의 백성들은 시간을 어떻게 알 았을까요? 낮에는 해를 보고 시간의 흐름을 짐작했지만 밤이 되면 시간을 알 수 없어 답답했지요. 그래서 성문이 열리는 오경(새벽 4시쯤)과 성문이 닫히는 이 경(밤 10시쯤)에 종을 울려 시간을 알려 주었어요. 백성들은 종소리를 듣고 하루를 시작했어요.
종각의 역사
조선 시대 때 한양에 종을 처음 건 것은 1398년(태조 7)으로, 광주에서 주조한 종을 청운교 서쪽(지금의 인사동 입구)에 종루를 지어 걸었어요. 그 뒤 1413년 에 종루를 통운교(지금의 종로 네거리)로 옮겼어요. 임진왜란으로 종루와 종이 불에 타 사라지자 1619년 (광해군 11)에 종각을 다시 짓고 종을 걸었지요. 이때 종각은 2층 종루가 아닌 1층 종각이었다고 해요.
종을 걸기 위해 지은 건물
보신각은 큰 종을 걸어 놓기 위해 지은 건축물이에요. 그래서 종각 또는 종루라고도 해요. 운종가의 동편 오늘날의 종로 네거리에 있는 전통 목재 건축물로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 중의 하나이지요. 종루에 걸린 종을 쳐서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정과 통행금 지를 해제하고 성문을 여는 파루를 알렸지요. 그뿐 아니라 도성 내에 큰 화재가 났을 때 종을 쳐서 모든 주민에게 알렸어요.
보신각종
보신각종은 원래 1468년(세조 14) 에 만들어져 원각사에 있던 종으로, 연산군 때 원각사가 없어지자 1536년(중종 31) 숭례문 12 안에 옮겨 놓았다가 1597년(선조 30) 명례동(지금의 명동) 고개로 옮긴 것을 광해군 때 종각을 복구하면서 보신각에 단 것이에요. 보물 제2호로 지정되어 있지요. 그 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몸통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좋을 칠 수 없게되자, 국립 중앙 박물관에 종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어요.
조선의 통치 이념이 깃든 이름
1895년 고종이 종각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내리 면서 그 이름을 얻었어요. 보신각의 이름에는 조선의 기본 이념인 유교 사상이 담겨 있어요. 조선은 유교의 대표적인 사상인 인(仁)·의(義)·예(禮)·지(智) · 신(信)의 '오행'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는데, 그중 '신', 즉 믿음을 중심으로 여겼어요. 그래서 한양 중심에 '신'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보신각이라는 건물을 세우고 그곳에 종을 달아 종소리가 울려 퍼지게 한 것이에요.
제야의 종
지금 보신각에 걸려 있는 종은 1985년 국민의 성금을 모아 새로 만든 것이에요. 그해 광복절에 처음 타종을 했어요. 타종이란 종을 치는 것을 말해요. 매년 12월 31일 자정에 치는 제야의 종이 바로 이 종이지요. 현 재의 건물 역시 6·25 전쟁으로 불타 버린 것을 1979 년에 서울시에서 다시 지은 것으로, 동서 5칸· 남북 5 칸의 2층 누각으로 되어 있어요."
종을 33번 치는 이유
새해 첫날이 밝은 섣달 그믐날 자정이 되면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33번 쳐요. 조선 시대 때 새벽마다 사대문 개방과 통행금지해 제를 알리는 타종, 즉 파루를 서른세 번 친 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해 요. 인정과 파루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종을 28번 치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28개의 별자리에 밤 동안의 안녕을 빈 것이며, 33번 치는 것은 도리천에도 종소리가 널리 울려 퍼지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 겨 있다고 해요. 도리천은 상상의 산인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하늘로, 동서남북 사방에 각각 여덟 계층의 하늘과 가운데 있는 하나의 하늘을 더해 33개 하늘로 이루어져 있는 곳이에요. 33천에 33번의 종을 치며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편안함을 기원한 것이지요.
위와 같이 한양의 중심에 제야의 종이 걸려있는 '보신각'에 대해 정리하였습니다.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