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은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집은 전투(행주 대첩)가 벌어진 곳입니다. 본문에서 행주산성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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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삼국시대의 산성?
행주산성이 정확하게 만들어진 연대와 목적은 알 수 없으나 산허리에 목책 자리가 남아 있고, 강과 험한 절벽을 이용하며 넓은 평야를 감싸 안고 있는 산성의 모습을 통해 삼국 시대 초기의 산성으로 짐작해요. 성에서는 삼국 시대(백제)의 토기나 기와 조각이 많이 발견되고 있지요.
임진왜란의 격전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 2월 12일, 행주산성에 머물고 있던 권율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과 행주산성을 점령하려는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어요. 동이 틀 새벽 무렵부터 3만 여 명에 달하는 왜군은 여러 겹으로 성을 포위하고 7개 부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공격했지요. 조선군은 왜군에 비해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병력이었지만, 용감하게 전투에 나서 왜군을 물리쳤어요. 이 전투를 행주 대첩이라고 불러요.
패배를 딛고 승리를 거둔 권율 장군
권율은 45세의 다소 늦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어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로 임명되어 용인에서 왜군과 싸웠으나, 병력과 무기가 뒤떨어져 왜군에게 패하고 말았어요. 권율은 패전의 충격을 딛고 일어서서 1592 년 7월에 벌어진 금산군 이치 전투에서는 왜군을 크게 물리쳤어요. 그해 12월 수원에서 다시 왜군을 무찌르고, 두 달 뒤에는 행주 대첩의 지휘관이 되었답니다.
행주 대첩 승리의 비결
행주 대첩을 승리로 이끈 데에는 활과 화살을 발전시킨 궐장노와 천자총통 · 지자총통 · 현자 총통 등 여러 종류의 화포, 신기전과 화차, 비격 진천뢰 등 무기들의 활약이 컸어요. 또한 권율 장군의 지휘 아래 미리 유리한 곳에서 목책 등 울타리를 튼튼하게 쌓고, 수차, 돌멩이, 양식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어요. 마지막으로 행주산성이 한강 일대가 훤히 보여 정탐과 방어가 모두 가능한 유리한 지형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 지요.
행주 대첩을 이끈 조선의 신무기
행주 대첩에서 맹활약한 조선의 신무기 중 신기전과 비격진천뢰가 큰 힘이 되었어요. 신기전은 화약이 타는 힘에 의해 날아가는 로켓 형태의 무기로 요즘의 탄도 미사일과 비슷해요. 사정거리는 1,000미터 정도로 화차에 넣어 발사했어요. 화차는 신기전 같은 화약 무기를 한꺼번에 많이 발사할 수 있도록 설계한 발사대예요. 비격진천뢰는 임진왜란 당시 이장손이 개발한 폭탄이에요. 지름 21 센티미터의 쇠공 속에 뾰 족한 철 조각과 화약통을 넣은 다음, 심지를 감 아서 꽂아 넣고 불을 붙여 폭발하게 하는 일종의 시한폭탄 같은 것이지요.
행주치마는 행주대첩 때문에 생긴 말이다?
행주대첩 당시 성 안의 부녀자들이 긴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주워 담아 날라서 전투를 도와,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 해져요. 하지만, 이 이야기는 잘못된 것이에요. 왜냐하면 행주치마는 행주 대첩 이 일어나기 76년 전인 1517 년 조선 중종 때 어문학자 최세진이 쓴 《사성 통해》에 이미 등장하기 때문이에요.
위와 같이 현재 고양시에 위치한, 행주산성과 관련하여 정리하였습니다.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